정천익은 이 씨앗을 지금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 심었으나 대부분 말라 죽고 그 중 1개가 싹이 나 가을에 백여 개의 종자를 수확하게 되었다. 정천익은 해마다 목화종자를 늘려 공민왕 16년 정미년(서기 1367년)에는 목화씨를 마을 전체에 나누어주어 재배하게 하였고 이 목화 재배가 전국으로 널리 퍼져나감에 따라 이 소식을 들은 우왕이 을묘년(서기1375년)에 문익점을 불러 전의주부 벼슬을 주어 복직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을 받들고 갔던 그해(서기1363년) 12월에 원나라가 임명한 새 왕 덕흥군이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이끌고 고려 공민왕을 축출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가 패퇴당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문익점은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는가 하면 덕흥군을 따르라는 원나라 황제의 명을 거역하다가 운남성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3년을 보내다가 돌아왔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십수년 전부터 문익점 선생의 후손들과 정천익 선생의 후손들 사이에 목화재배지와 목화재배에 따른 공로문제를 두고 한 치의 양보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적108호 문화재 명칭을 “문익점 면화 시배지”가 아닌 “정천익 목면시배유지”로 해야 한다고 정씨 문중이 이의를 제기하자 문화재청은 “목면시배유지”로 명칭을 변경 공포했다. 이렇게 되자 문씨 문중은 구 명칭으로 다시 변경해 줄 것과 “목면시배유지”에 세워놓은 정천익 선생의 신도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요구를 관계요로에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 싸움을 지켜보면서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씨족관념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같은 관념이 지나치면 집단이기주의나 배타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고 세계화와 민주주의 발전에도 저해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같은 의식이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를 보는 판단규준이 바로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규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이며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가 필요하다. 실사구시란 실증에 근거하여 진상을 추구한다는 의미이지만 구체적 의미는 실사(實事)는 객관적으로 일체의 사물을 본다는 뜻이고 구시(求是)는 사물의 내재법칙이나 연관성을 연구한다는 뜻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문익점선생이 목화씨를 가져온 일과 정천익선생이 최초로 목화를 재배한 일은 분리해서 볼 수 없고 한 사건의 주체와 객체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최초의 목화재배 사건이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사건보다 더 중요시 되거나 높이 부각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집을 지을 때 시공자가 아무리 시공을 잘 했어도 그 집을 설계한 사람의 업적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이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사신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예상치 못한 전란에 휩싸여 목숨까지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잊지 못하여 원나라의 금수품목 중의 하나인 목화씨를 몰래 숨겨 들여온 문익점 선생의 애국적 행위는 높이 평가하고 길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위인 문익점이 파직을 당한 채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가 가져온 목화씨를 정성을 다해 가꾸며 전국에 보급한 전직 고관출신인 전객령(정3품) 정천익 선생의 업적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정성어린 노력이 없었다면 문익점의 꿈도 계획도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가 그의 사위를 복직시키는데 까지 공헌했다고 본다면 훌륭한 자녀 뒤에는 훌륭한 어버이가 있다는 옛사람들의 말을 실감케 해주고 있다. 그래서 두 문중은 서로가 싸우기보다 협력해서 두 분의 업적을 송축하는 비를 나란히 세우고 두 문중의 후손들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들의 공적을 영원히 추모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두 주인공은 그들의 문중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문중이 두 분의 업적을 두고 싸우는 것은 두 분을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고 크게는 모욕하는 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서기1364년 3월경 목화씨가 우리 땅에 심어질 때 우리 민족의 복식 문화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때 원나라에는 견직과 면직물이 널리 퍼져있었지만 우리 한반도에는 일부 고관들이나 호족들을 제외하고는 갈포(칡뿌리로 만든 실을 그물처럼 엮어 만든 천)나 짐승의 가죽으로 남녀가 똑같이 신체의 국부만 가리우고 살았던 것이다. 이같은 시대에 목화를 보급시킴으로 우리 민족의 복식 문화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한 이 역사적 사건이야 말로 한국 사람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매년 3월이 가고 4월이 되면 남쪽에서는 밭에 목화씨를 뿌린다. 여름 내내 관목처럼 무성하게 자란 목화는 황백색의 꽃이 피고 다래처럼 열매가 형성된 후 가을이 되면 그 다래가 터지면서 하얀 솜이 나온다. 솜털은 여인네들의 수많은 손길을 거치면서 의복이 되고 이부자리가 된다. 그리고 씨앗은 기름을 짜서 식용유나 등유로 사용했다. 그래서 목화는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목화를 생각하면서 사람도 이 목화처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 모든 이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사람, 모든 이들을 윤택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문익점이나 정천익선생처럼 국민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